School 101

2024년 27명을 마주한 역주행기

babosky 2024. 3. 17. 22:33

28년 전 고등학생일 때 우리 반 인원은 60명에 육박했다. 전통적으로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을 위한 연합고사 컷오프 점수가 성별에 따라 달랐고 여학생 컷오프 점수는 늘 남학생 점수보다 높았다. 그런데 우리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그 해에 그 길고 긴 전통이 깨졌다. 어째서 같은 점수를 받았는데 성별에 따라 누구는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이 가능하고 누구는 가능하지 않은가에 대해 학부모와 학생들이 거세게 반발했고 딱히 무어라 변명할 수 없었던 교육청은 즉시 인문계 컷 점수를 남녀구분 없이 동일하게 적용하기로 했다. 이미 컷 점수는 발표가 났던지라 결과적으로 인문계 여자 고등학교들의 입학생 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변하지 않은 교실의 크기를 생각하면 어떻게 교실이라는 공간에 큰 책가방 하나와 도시락 두 개를 매달고 있는 60여 개의 책걸상과 우리가 공존할 수 있었는지 까마득하다. 그럼에도 분단과 분단 사이사이를 비집고 헤쳐나가던 우리는 또 그러려니 했다.

20년 전 처음 들어선 교실엔 35명이 앉아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하며 바라보는 35쌍의 눈동자가 사실은 몹시 불편했고 중학생들은 아직 정말 작다라든지 앞에서 보니 정말 다 보이네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그 공간엔 그래도 맨 앞줄의 아이가 교탁에 가려지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보일만큼 그들과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있어서 숨 쉴만했다.

6년 전 9월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수업을 마무리짓던 나는 33명의 고등학생들에게 2주 후부터 시작될 나의 휴직과 그로 인한 교과담당 및 담임 교체에 대해 최대한 담담하려 애쓰며 이야기했고 교탁 앞에 바짝 붙어 앉아있던 녀석이 울기 시작하는 걸 보다 감정이 몹시 흔들려 버렸다.

4년 전 다시 복직한 학교는 그 사이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친 뒤였다. 새 사물함과 청소도구함이 복도로 나오고 그 덕에 넓어진 교실엔 삐걱이던 나무바닥 대신 밝은 미색의 타일이 깔렸다. 형광등 대신 LED등이 설치되고 초록색 칠판 대신 화이트보드가 설치된 탓인지 교실의 모든 것이 무척이나 밝아져 있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라 마스크를 끼고 짝도 없이 뚝뚝 띄어 앉은 20명의 학생들과 여분의 책걸상 4쌍이 들어가고도 교실은 무척 넓었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몸을 틀거나 헤쳐나가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곳에서 우리의 동작은 자유로웠다.

오랜만에 다른 학교로 발령받은 2024년 2월의 어느 아침 27명이 앉아 있는 교실의 문을 열었다. 맙소사 여긴 아직 초록색 물칠판을 쓴다.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교실 안 복도 쪽 벽엔 깔끔한 28개의 새 사물함이 놓여 있었다.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학교 건물은 복도가 너무 좁아 사물함을 둘 수 없고 교실 뒤편엔 활용도가 낮을 것 같은 초록색 칠판이 하나 더 설치되는 바람에 저기엔 사물함을 둘 수 없었겠다 싶다. 뒤편 칠판 앞에는 몇 학년 몇 반이라고 적힌 스티커가 여러 개의 스티커 자국 위에 붙어있는 청소도구함이 창쪽에 바짝 붙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중간도 아닌 애매한 자리에 놓여 있고 그 앞으로 27쌍의 새 책걸상, 여분으로 남긴 2쌍의 옛날 책걸상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옆면과 뒷면이 막힌 공간에 아이들이 끼어 있고 나는 그 광경이 몹시 낯설다.

한동안은 수업 환경의 개선이 화두였고 시설 정비에 많은 예산을 투입해 이론적으로는 노후화된 학교부터, 그러나 종종 생각보다 많이 교육청 지정 사업에 앞장서는 학교들부터  학교의 물리적 환경 변화가 이루어져 왔다.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어느 학교는 교실마다 빔프로젝터를 이용해 화이트보드에 마커로 수업을 하는데 한날한시에 아직도 형광등 불빛 아래 탄산분필로 수업을 하는 학교가 있다. 물리적 변화 속도에는 훨씬 못 미치는 빠르기로, 아무리 교육전문가와 교원단체들이 재촉하더라도 굴하지 않는 느린 걸음으로, 학급당 학생 수는 천천히 줄어들다 어느 순간부터는 물리적 환경이 변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자연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런 감소가 불가항력적인 일이 되어서 인구 구조의 고령화와 연금 고갈에 이어 인구 소멸과 나라의 존폐를 걱정하는 시대에 나는 불현듯 교실에서 타임머신 체험을 한다. 20년이 넘는 시간을 거쳐 느리지만 그래도 꾸준히 진행되어 오던 ‘학급당 학생 수 줄이기’는 ‘학교당 학급 수 줄이기’라는 교육청의 강한 의지와 함께 멈췄다. 교육청은 여러 해에 거쳐 많은 예산을 IB교육과정과 AI융합교육 같은 타이틀을 가진 사업들에 배치해 오고 있었고 올해는 세수 감소와 함께 줄어든 교육예산을 다른 분야에 쪼개 쓸 여유가 없을 것이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선거로 선출된 교육감은 으레 자신의 업적을 남기고 싶어 하기 마련이고 집중적으로 예산을 쓰고 싶은 분야가 있게 마련이다. 이를 테면 어느 날 자공고로 지정된 모든 학교에 갑자기 기숙사가 만들어져 운영되다가 다른 교육감이 선출되면 기숙사 운영에 쓸 예산을 없애고 기숙사 건물의 새로운 활용방안을 모색해 보고서로 제출하라는 지시가 떨어지는 바람에 학교는 사용한 지 얼마되지 않은 침대며 매트리스며 수납장이며 세탁기 등을 처분해야 하는 식이다. 올해 교육청은 정책적으로 각 학교의 학급 수를 줄였고 거의 모든 학교에서 학급당 학생수가 증가했다. 한 학년당 한 학급씩만 더 있어도 적절한 수준의 학급당 학생 수를 유지할 수 있는데도 교육청의 방침에는 번복이 있었던 적이 없다. 불과 몇 주 전까지 18명을 데리고 생활하던 나는 27명을 처음 만나는 자리가 당황스럽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게 마련이라 불과 얼마 전까지 18명의 아이들과 넓은 교실을 누리던 탓일 거라고 생각해 보려 해도, 시간을 거슬러 나의 고등학교 시절까지 떠올려 봐도 익숙해지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이다. 여기에 여전히 학급당 20명의 학생수를 사수하고 있다는 사립고등학교 소식까지 더해지니 공립학교 교육의 질 저하라는 프레임까지 완성되려 한다. 요즘처럼 학생 한 명 한 명에 대한 개별적인 기록이 입시에서 중요해지는 시점에서 이런 상황은 업무량의 증가와 동시에 학생의 개별적 특성을 파악하는 작업의 어려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교사들 사이에선 예산의 사용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선거가 아니라 교육위원회에서 교육감을 선출하던 예전 방식이 더 나았다고 말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산을 특정 방향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반드시 학교 현장에 필요한 일이 아닌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일례로 어느 교육감의 선거 공약으로 모든 학교의 교실마다 설치된 공기청정기를 들 수 있다. 여름날 냉방기기와 공기청정기를 같이 작동했더니 학교 전체의 전원 공급이 차단되는 바람에 결국 공기청정기는 사용할 수 없었다. 전기 승압공사는 규모나 비용 면에서 학교 차원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해프닝을 겪고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 시국이 닥쳤고, 공기전파로 인한 감염에 대해 자신할 수 없었으므로 결국 공기청정기는 아예 없는 거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사용하지 않는 공기청정기의 필터를 정기적으로 교체하는 비용이 계속 지불된다는 것이다. 공기청정기와 필터를 관리하는 업무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이 바닥에선 한번 생긴 일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런 방식의 예산의 사용이 교육의 질의 향상으로 이어졌다는 실증적 증거가 전무하다. (물론 교육이 무엇이고, 교육의 질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향상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을 측정할 수 있는지를 정의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교육은 공공재이고 세금으로 운영되는 일이다. 예산이 사용되는 주된 목적이 무엇인지, 그로 인한 혜택을 받는 이가 누구인지, 그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는 것인지, 그 사용에 있어 과함이나 모자람은 없었는지를 가장 시의적절하게 판단할 수 있는 주체는 학교일 것이다. 개별 학교는 각자의 독특하면서도 다양한 사회문화경제적인 맥락 속에 놓여있고 각자의 특수성을 가진다. 따라서 예산 사용의 원칙 또한 학교가 가진 특수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했을 때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일 것이다. 학교와 교실에서 동떨어진 누군가가 가리키는 아득하게 먼 곳을 향해 쓰기에는 내 유리지갑이 너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