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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ool 101

고교학점제를 살리려면

고교학점제에 대해서 지금까지 내가 인지한 바로는, 아직은 고등학생이 아닌 학생들과 그들의 학부모들은 대체로 환영하는 것 같다.
아마도 어떤 ’근본적 변화‘를 기대하는 것 같은 그들의 센티멘트에선 내가 중학생일 시절 당시 처음 시행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대해 이야기하던 선생님들의 열띤 목소리에서 느껴지던 들뜬 흥분감이 느껴진다.

이미 몇년 전부터 전국의 많은 고등학교는 고교학점제 연구학교 또는 선도학교 등으로 선정되어 실제 고교학점제를 시행하는 것처럼 교육과정을 운영해 왔다. 이미 전국의 고등학교 시스템은 학점제에 익숙해져 있다. 고교학점제 시행에 따른 학교 현장에서의 혼란은 그닥 크지 않을 것이고, 이미 각종 시나리오에 대한 예비는 어느 정도 돼 있는 셈이다. 

 

거기다 올해부터 국/영/수 과목에서는최소성취수준보장이 시행된다. 올해 고1들이 학기말에 최소 성취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을 경우 학교는 이들이 최소 성취수준을 넘길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 방침은 해마다 1개 학년씩 확대되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과목, 모든 학년에서 최소성취수준보장이 의무화 된다. 2025년이 되면 최소성취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필수출석률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 실제로 학점 미이수가 발생하게 된다. 즉, 지금 우린 고교 학점제의 틀은 거의 갖추었다. 이제 남은 것은 2025년까지 기다리는 것 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가장 피부로 느껴지는 변화는 학생들이 직접 수강신청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학급의 구성과 과목별 시수와 과목별 교사의 수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고교학점제의 핵심은, 혹은 정수(essence)는, 바로 이 지점, 즉 학생의 과목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이 학생과 학부모에게 고교학점제가 어필하는 지점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수강신청과정을 한번 들여다 보면서 얼마만큼의 선택권이 보장되는지 한번 따져 볼 만한 일이다.

아래 표는 2015 교육과정에 따른 보통교과이다 (전문교과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참고로 과목 선택은 고교 2학년부터 적용된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는 기초교과, 즉 전국의 모든 고교 1학년들이 반드시 공통으로 이수해야 하는 과목들을 이수한다. 어떤 학교 교육과정편제표를 보든 일반 고등학교 1학년들이 수강하는 과목은 ‘체육/예술’과 ‘생활/교양’ 과목을 제외하면 거의 동일하다.)



기초교과를 이수한 뒤 고등학교 2~3학년을 거치면서 학생들이 이 과목들 중에서 본인이 수강할 과목을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수능출제에 반영되는 과목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래 표에서 하늘색 사각형으로 표시된 과목들이 수능의 ’시험범위‘에 해당하는 과목들이다. 이 과목들 대부분은 필연적으로 학교 지정과목으로 고정된다.

‘일반 선택’ 과목은 대체로 2학년에 집중적으로 개설되고, 3학년 때는 ‘진로 선택’ 위주로 교육과정을 편성하는 학교가 대부분이다. 이유는 두 과목 유형의 성적처리 차이 때문인데, ‘일반 과목’은 석차등급이 산출되고 ‘진로 선택’ 과목은 성취도 3단계(A, B, C)로 처리된다. 성취도 ‘A/B/C’는 입시전형에서 대학별로 1/2/3등급, 1/2/4등급, 혹은 1/3/5 등급 등으로 인정해 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성적에 대한 부담이 덜하고 따라서 3학년 때 이런 과목을 많이 배치하게 된다.

국/영/수 과목들이 수능에 반드시 포함되는 필수과목 (독서, 문학,수학1, 수학2, 영어1, 영어2 - 반드시 이수) 또는 수능 선택 과목(화법과 작문 / 언어와 매체 - 중 택1, 미적분 / 확률과 통계 중 택1) 등으로 학교 지정으로 고정되고 나면 결국 학생들이 가장 많은 선택의 자유를 만끽하는 과목은 ‘탐구’과목과 ‘체육/예술’, 그리고 ‘생활/교양‘ 과목들이다. 이같은 원리를 알면 학교의 교육과정편제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교육과정편제표는 사실 관심을 두고 오래 보아야 보인다).

한 가지 더, 과목 선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은 바로 학과별로 존재하는 수능선택과목과 관련한 제약조건들이다. 이공계열로 진학하려는 학생들에게 수능 수학에서 미적분 또는 기하를 선택하기를 요구하는 경우가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제 대학들도 공식적으로 문/이과 구분을 두고 학생을 모집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수학 선택과목을 무엇으로 선택하는지에 따라 문/이과가 나뉜다고 봐야 하고 이공계열 전공학과들이 수능에서 미적분과 기하를 선택할 것을 조건으로 내건다면, 학생의 과목 선택도 당연히 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서울 주요 대학들이 의대 입시에서 이 조건을 완화할 것으로 발표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대학들이 나서서 미적분이나 기하를 이수하지 않은 학생들을 위한 강좌를 자체적으로 개설한다든지 하는 정도로 고교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에 발맞춘 제스처까지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학교 교육과정은 현재 수능의 과목 구성에 따를 수 밖에 없고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도 거의 전적으로 그에 따라 결정된다. 고교학점제 본격 시행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아직 교육부에서 뚜렷한 청사진이 나오지 않은 많은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수능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이다. 현장에는 고교학점제 시행에 따른 변화는 이미 와 있지만 수능의 변화에 대해서는 어떤 방향성도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수능이 지금처럼 입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지금과 같은 형태를 유지한다면,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결국 지금과 같이 수능에 최적화된, 수능 시험의 편제에 따라 과목 선택의 자율성이 제약을 받는 ’틀만 갖춘 고교학점제인 교육과정‘일 것이다. 

결국 수능 중심의 입시가 어떻게 바뀌는지가 고교학점제를 완성할 수도 있고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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